생애와 발자취
해위는 고위 관료로서의 탁월한 행정능력과 경험,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탄탄한 이론과 열정, 높은 인격과 윤리적인 삶을 바탕으로 민주당 구파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받았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윤보선을 초대서울시장에 발탁했다. 그 이듬해에는 상공부 장관에 임명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 해위의 자질과 능력에 신뢰를 갖고 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했다.
이후, 해위는 독재타도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승만의 독단적이고 불합리한 통치방식과 그의 비민주주의 의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이승만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자신의 통치에 이용하려 했다. 그가 주장하던 일민주의는 독재와 국수적 민족주의로 귀결되었다. 의회민주주의의 신봉자 윤보선은 스스로 야당에 뛰어들며 여기에 저항했다.
유석 조병옥(趙炳玉)이 제 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사망한 뒤, 윤보선은 민주당 구파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를 받았다. 그것은 고위 관료로서의 탁월한 행정능력과 경험,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탄탄한 이론과 열정, 높은 인격과 윤리적인 삶을 바탕으로 한 지도력이 그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