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기념사업회

해위 윤보선기념사업회

설립배경


일찍이 대한민국 제 4대 대통령인 해위 윤보선 선생은 21세에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영국에 유학하여 의회민주주의의 사상적 실제와 그 실천을 습득하고 십 수년 만에 귀국하였다. 광복 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총무가 되고 이승만 박사의 대한민국 건국 노선을 대변하는 민중일보의 사장이 되었다.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서울시장,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고 6.25 동란 중에는 적십자 총재로 구호사업에 전력했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권의 행태가 자유민주주의의 실천과는 거리가 멀다하여 이를 거절하고 스스로 야당의 길로 들어섰다.

사변 후 야당인 민주당의 최고위원으로 3대, 4대 5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1960년 8월에는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2년 3월에 군사정부를 반대하고 정쟁법을 거부하며 대통령을 사임했다. 1963년 정치활동이 재개되면서 민정당을 창당하여 5대 대선 후보가 되었으나 15만여 표차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역사는 그 때의 선거 결과를 신뢰하지 못하여 해위를 ‘정신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 후 6대 국회의원으로서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을 하다가 1965년 국회의원을 사퇴했다. 철저한 항일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해위로서는 이를 묵고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67년 이후, 제도권 정치를 떠났던 선생은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로 재야운동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군사 재판을 받고 가택 연금을 당하였다. 그렇지만 해위의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불의라고 생각되는 것에 철저히 저항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에 저항하고 유신체제를 거부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해위는 인간의 자유가 보장되는 근대 시민 사회 구현을 삶의 목표로 하였다. 높은 품격을 갖춘, 민주사회에 대한 선생의 이상은 후배 정치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렇듯 선생은 광복 후 30년간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정통과 본류에서 그 이상을 실천하며 남다른 저항과 책임의식을 보여주었다. 이에 해위 선생을 받들던 후진들이 작은 정성이나마 뜻을 모아 끼친 덕망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일련의 기념사업을 선생 서거 20주년인 2010년을 기하여 폭넓게 펼치기로 다짐하였다. 기념사업회는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 469, 7층 서원빌딩 (경운동 91-1) Tel: 02-735-0826 E-mail : admin@yunposu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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