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귀 여사

공덕귀 여사 이야기

해위가 한국 민주운동의 선구자였다면
그녀는 ‘민주운동의 代母(대모)’였다.

해위가 62년 3월 22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청와대를 떠날 때, 영부인 공덕귀여사는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를 꽃 피우려 할 즈음 총칼 앞에 중책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하는 아픔이 왜 없었겠는가”라고 호소했다. 그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남달랐다. 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여사의 이름은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해위가 민주화회복운동의 선구자였다면 그녀는 ‘민주화 운동의 代母(대모)’였다.

공덕귀는 1911년 4월 21일 경남 충무(지금의 통영)에서 대한제국 군인인 공도빈씨와 방말선(공마리아)씨의 5녀 2남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으나 어머니는 7남매를 강하게 키웠다. 그녀가 어려서부터 인도선교사를 꿈꾸었던 것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기독교 신앙과 독립심 때문이다.

통영공립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 동래의 일신여고를 거쳐 일본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로 개명)로 입학했다. 졸업 후 송창근이 담임하고 있던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대구 도경의 고춧가루 물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녀에게 신앙과 애국은 구별이 될지언정 차별이 되지 않았다.

해방 다음해 1월, 송창근이 주도하고 김재준, 한경직, 정대위, 조선출 목사 등이 교수로 있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 여자신학부 교수가 되었다. 학문적 갈망으로 인해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가려는 도중, 송창근 등의 강권으로 해위와 결혼했다.

39세에 상구를 낳고 부산 피난 중 42세에 동구를 낳아 남편과 시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남편이 서울시장이었고, 다음에 상공장관이 되고 민의원이 되어도 별 감흥이 없었고 한번도 유세장에 따라가 본 적이 없다”며 정치에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부인이 된 이후에도 아주 조용한 영부인으로 지냈다. 영부인으로 내조는 했지만 정치에 간여하지 않았다. 영부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신념처럼 며느리요 아내요 어머니를 고집했다.

그러나 매일 새벽 3-4시면 일어나서 나라를 위한 구국의 기도를 하는 것은 그녀의 일상이었다. 밤낮없는 데모와 점차 무엇인지 모를 불안한 시국을 보며 “주여, 이 백성을 어찌하시렵니까?”라고 기도했고 “이 나라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도 여사는 “오, 하나님! 이 백성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총칼로 나라를 송두리째 차지하다니. 주여,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녀의 모든 것은 신앙의 발로였다.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 사임 후, 그녀는 박순천, 이우정, 이태영 등과 함께 여성운동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리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벌였다. 모두 성서적 교훈에 따른 것이다. 안동교회에서의 성경공부가 모든 활동의 원천이다.

1969년 서울 안동교회 여전도회장을 맡은 이후, 1972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서울연합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74년에 교회여성협의회 초대 인권위원장이 된 후, 7월부터 정기 목요기도회를 기독교회관에서 오전 10시에 열었다. 그녀로 인해 구속자 가족연대가 강화되고, 저항의 용기가 살아났다.

1976년에는 ‘3·1 사건 가족대책협의회’회장, 77년 봄에는 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 되었다. 1977년부터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활동도 전개했다. 방림방적체불임금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NCC 인권위원회 후원회 부회장이 되었다. 1978년 동일방직사건긴급대책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79년에는 YH무역 여공을 위해 투쟁했다.

사람들은 전직 대통령 부인이어서 방패막이가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녀도 차이고 연행되었으며 감시당하고 구속되었다. 명동 구국 선언 재판 당시 참석했다가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등과 함께 강제로 연행되고 길바닥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사의 단식농성, 철야농성, 시위는 계속되었다. 살벌한 시국에도 여사는 매일 인권 강연회를 열고 양심수들이 갇혀 있는 교도소를 방문했다. 부활절이면 구치소 뒷산 동네에 몰래 모여 새벽송을 크게 불러 가족에게 용기를 전하기도 했다.

80년대에 70세에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민주화 조치가 취해지지 않자, ‘5·18 광주 민중항쟁’ 구속자 가족 지원활동에 참여하고, 시인 김지하와 ‘인혁당 사건’ 구속자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72세에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장을 맡아 교회일치운동을 이끌고, 75세에는 5년동안 ‘교회일치여성협의회’ 초대회장을 맡았다. 해위가 세상을 떠나 후, 81세가 되던 해에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결성에 참여했다.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 하고자 했던 것이다.

1993년 혼수상태에 빠진 뒤 건강을 잃었고 잠시 치매에 시달렸다. 그러나 다음해 10월에 기적적으로 정신을 회복하고 자서전 《공덕귀-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를 출간했다. 1997년 11월 24일 오전 7시30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86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그리고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2구 비룡산에 있는 가족묘지 맨 위에 해위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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